산수유 둘레길 따라
이천 산수유 둘레길
문득 당신을 둘러싼 시멘트 건물에 답답함을 느낀다면,
문득 당신이 서 있는 아스팔트 바닥에 이질감이 느껴진다면,
문득 당신의 들숨과 날숨에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이천 산수유 둘레길로 향해보자.
이천 산수유 둘레길은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에 위치 해있다. 도립리는 이천의 도심으로부터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심리적인 거리는 완벽히 도심과 분리된 아이러니한 기분이 드는 마을이다.
이 여정은 산수유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주차장에 도착하면 푸르른 원적산을 등지고 멋스러운 기와를 자랑하는 한옥 산수유 사랑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사랑채는 이천시가 만든 복합문화공간으로 한옥 숙박, 전통체험, 단체 워크샵 등 다양한 쓰임으로 방문객들에게 추억을 제공하니 이곳으로 오는 여정에 시간을 보탠다면 더 풍성한 쉼이 될 수 있겠다.
주차장에서 원적산의 정상을 바라보며 가볍게 몸을 풀면 시작부터 그 정기를 받아 일상의 고민이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이 둘레길은 주차장에서 원적산 정상을 바라보고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다시 주차장으로 도착하는 100분여의 코스이다. 같은 공간에 100분 후에 도착할 자신의 모습을 기대해보는 것도 좋겠다. 충분히 준비운동을 했다면 힘차게 발걸음을 시작해보자.
첫 번째 구간은 산수유 사랑채에서 육괴정까지 향하는 300m여 간의 구간이다. 이 구간은 고즈넉한 도립리 마을 길을 걸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원적산과 높은 하늘을 바라보기 좋은 구간이다. 저벅이는 걸음 소리를 들으며 이 발걸음이 향하는 육괴정이 어떤 곳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육괴정은 1519년 조선 중종 14년 기묘사화 때 난을 피해 낙향을 한 남당 엄용순이 건립한 정자이다. 이 정자에 당대의 선비였던 모재 김안국, 강은, 오경, 임내신, 성담령 그리고 남당 엄용순 등 여섯 사람이 모여 우의를 기리는 뜻으로 각자 한그루씩 총 여섯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는 데서 육괴정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잠시 걷다 보면 저 멀리 거대한 느티나무에 둘러싸인 향토유적 13호 육괴정이 보인다. 유래대로 최초에는 정자였으나 수차례의 중건을 거쳐 현재는 사당의 모습이다. 그 주변에는 600년의 세월을 말하듯 근엄한 자태를 뿜어내는 느티나무가 굳건하게 서 있는데 그 자태에 겸허한 마음마저 든다. 600년간 이곳을 지키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고 기억할까. 그중 우리의 모습도 담기겠지.
육괴정부터 본격적인 둘레길이 시작되는데 산행을 포함한 둘레길보다 가벼운 산책 정도를 원한다면 그 근처를 걷는 왕복 1km 정도의 연인의 길도 있으니 참고하면 좋겠다.
이정표를 따라 둘레길을 계속 걸어본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조금씩 오르막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다. 최근 이천시에서 둘레길 노선에 대한 정비를 마쳐 가파른 경사로 구간을 피해 편하고 안전하게 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이정표를 따라 걸으면 된다.
걷다 보면 산수유가 우거진 따뜻한 봄에 이 길을 찾아도 좋겠지만 녹음이 우거진 여름, 단풍이 우거진 가을, 눈꽃이 우거진 겨울 그 어느 계절에 걸어도 이 둘레길은 매력적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적당한 오르막을 걸으며 땀이 촉촉하게 맺힐 때쯤 어느 순간 시야가 탁 트이는데 그 순간 저 멀리 이천시의 도심이 보인다. 원적산 속에서 바라보는 도심의 거리감은 일상과의 거리감을 느끼게 해주고 때마침 불어오는 산바람은 잔잔한 시원함과 위로를 건넨다.
영원사는 638년 신라 선덕여왕 때 해호선사가 지은 원적산 북쪽에 위치한 사찰로서 아늑하면서도 그 세월의 위엄을 자랑한다. 영원사의 ‘대웅전’에는 향토유적 제12호 지정된 ‘약사여래불’이 있다. 이에 관한 흥미로운 전설이 있다. 1068년 고려 문종 때 영원사에 큰불이 나 혜거국사가 절을 다시 중창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꿈에 ‘약사여래불’이 나타나 “왜 나를 버려두고 갔느냐?”고 호통을 치셨는데 신기하게도 같은 날 영원사 신도들이 모두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급히 산으로 다시 올라 가보니 ‘약사여래불’ 불상이 산에서 스스로 내려와 있었고 그곳에 ‘대웅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산비탈을 따라 내려앉은 영원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손길 때문인지 아기자기하며 섬세한 멋을 품고 있다. 절 중간에 위치한 약수터에서 마시는 물 한 모금은 몸과 마음의 갈증을 씻어 주기에 충분하다. 약수로 갈증을 채우고 정자의 그늘 아래 앉아 땀을 식히며 절의 연못과 연꽃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고요히 시간이 멈춘 기분이 든다.
충분히 몸과 마음에 쉼을 느꼈다면 다시 몸을 일으켜 걸음을 계속해보자. 이제는 내리막길을 따라 산수유 마을로 돌아가는 구간이다. 산수유는 선비들이 심기 시작했다고 하여 ’선비꽃‘이라고도 불리며 ‘봄의 전령사’로도 불린다. 산수유는 내한성이 강하고 이식력이 좋아 진달래나 개나리, 벚꽃보다 먼저 개화한다고 한다. 다만 산수유의 약점은 공해에 약하다는 것인데, 그런 약점을 가진 산수유가 이 마을 지천으로 널렸다는 것은 이곳이 얼마나 청정한 곳인지를 의미하는 뜻이기도 하겠다.
산수유 마을 길은 전쟁도 피해 가는 동막골처럼 어떤 세상의 풍파도 이곳은 피해 가는 듯 평화롭다. 그 고요한 분위기 속에 울타리 안에서 유유히 걷고 있는 말까지 만나게 되면 세르반테스 ‘돈키호테’에 나오는 스페인의 어느 길을 걷는 기분도 든다. 선비의 지역답게 마을 한쪽에는 도립서당이 위치 해있다. 서당에서는 아이들에게 글공부, 마음공부, 전통체험 등 다양한 교육을 제공한다고 한다. 그렇게 두리번두리번 마을을 구경하며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저 멀리 처음 준비운동을 하던 한옥 산수유 사랑채가 보이며 이 둘레길 여정은 마무리를 맺는다.
100여 분의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둘레길 속 역사와 자연. 그 속에서 얻는 쉼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힘을 실어 주기에 충분하다. 옛 선비들이 택한 이곳. 선비의 시심이 깃든 산수유 둘레길을 여러분께 추천한다.